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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디자인하는 기업 무인양품
글쓴이 : 패키지포유 날짜 : 2021-03-07 (일) 14:49 조회 : 1927












무지는 덜어내는 것을 디자인의 시작이자 기능이라고 본다. 재료도 줄이고, 크기도 줄이고, 불필요한 형태나 기능을 최소화해 ‘이것으로 충분한’ 물건을 만든다. 원동 력은 인간의 행동에 대한 관심과 관찰에서 시작된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말 은 120도 각도인데 알다시피 인간의 발목은 90도에 가깝다. 발뒤꿈치 부분이 직각 으로 발에 착 감기는 양말, 발이 달려 그 자체로 침대인 매트리스, 우산 손잡이 끝에 작은 구멍을 내 각자의 표식으로 끈을 묶을 수 있는 여지를 둔 우산 등은 소박하지만 마무리가 꼼꼼하고, 작은 차이지만 은근히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우리는 우산을 세 워둘 때 벽면 타일에 홈이 있다면 그곳에 우산을 기대어놓는다. 그러니 따로 우산 꽂 이를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벽면에 홈을 파놓으면 된다. 무지가 우산 꽂이를 디자인 하는 접근법이다. 글: 김은아 기자

양심에서 시작된 크리에이티브
무지는 2011년 3월 일본 대지진이 불러온 혼란 속에서 당연시해오던 일상 속 진짜 중요한 가치를 되짚는 전시를 열었다. 바로 2012년 3월 1일 도쿄 아틀리에 무지를 시작으로 런던 디자인 뮤지엄과 홍콩, 대만, 싱가포르, 샌프란시스코, 태국을 순회한 <피트니스 80Fitness 80> 전시다. ‘기존 물건의 8할만으로, 지금보다 20% 적은 재료로 상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으로 물질 만능 세태에 제동을 걸었다. 폭이 조금 좁은 두루마리 화장지와 포장용 박스 테이프, 길이가 조금 짧은 면봉, 두께가 조금 얇은 화장품 용기, 플라스틱 카드의 마그네틱 부분만 남기고 절반 크기로 줄인 무지 멤버십 카드 등이 화이트 큐브에 걸렸다. 무지의 아이디어는 공통적으로 쿨하다거나 스타일리시하기보다 은근한 기분 좋음을 머금고 있다. 혼자 튀지 않는다. 무지의 제품 디렉터 나오토 후카사와는 무지 30주년을 기념해 무인양품에서 발간한 책 <무지>에서 사물과 바탕의 상호 관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식탁 위 음식이 근사하게 보이려면 우선 접시가 멋져야 합니다. 접시가 곧 배경이자 밑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접시가 근사해 보이려면 다시 배경이자 밑바탕이 되는 테이블이 멋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조화에 균형을 맞추면 전체가 훌륭해질 수 있습니다.” 무지는 1980년, 당시 고도의 소비 사회에 대한 안티테제에서 비롯됐다. 한쪽에서는 미국이나 유럽의 럭셔리 브랜드가 경기 호황을 타고 인기를 구가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형편없는 품질의 싸구려 제품이 등장해 양극화를 달리던 시기였다. 무지는 이 세태를 비판하면서 삶과 물건의 균형을 맞추자고 제안했다. 그 방법으로 ‘상표가 없는 좋은 물건’, 무지루쉬 료힌을 들고 시장을 두드렸다. 초기에는 유통 기업 세이유의 PB 생활 디자인 브랜드로 식료품 31개 품목과 생활 잡화 9개 품목으로 시작했으나 시장의 폭발적인 반응에 1985년 무지 전담 부서를 꾸린 뒤 1989년 양품계획이라는 독립 회사로 분리했다. 유통 전문 기업가이자 시인인 쓰쓰미 세이지가 경영을 맡고 일본 그래픽 디자인계의 전설 다나카 이코가 첫 아트 디렉터를 지냈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일본 브랜드 인지도 17위, 브랜드 가치 10억 4600 달러(약 1조 2460억 원)의 무인양품은 오늘날 일본 내 400여 개, 유럽, 아시아 등 해외에 300여 개 매장을 두고 지우개에서부터 집까지 7000개가 넘는 품목을 판다.

문명이 아니라 문화를 좇는다
무지는 특히 서구 시장에서 일본의 젠(zen)을 상징하는 거대한 판타지를 구축한 브랜드다. 생경할 법한 일본의 선(禪) 사상에 뿌리를 둔 무지가 글로벌 시장의 중심부에 다다른 데는 문화를 전략으로 삼은 확고한 관점이 있다. 가나이 회장이 강연에서도 언급했듯 오늘날 우리는 어디를 가도 비슷한 형태의 건물이 즐비한 세상을 살고 있다. 이런 문명적 요소는 더욱 빠르게 세계적으로 닮아가는 반면,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차이점을 필요로 한다. 그 차이를 무지는 이미 존재하던 고유의 문화로 봤다. 그래서 무지는 문명이 아니라 문화를 좇는다. 가나이 무지 회장은 언젠가 삼성전자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한다.

“20년 후에 한국에 남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갤럭시 휴대폰인가요, 김치인가요?” 김치는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청중은 입을 모았다. 이렇듯 지구촌 여러 군데에서 반드시 남았으면 하는 물건들의 전람회이자 제품 라인이 파운드 무지다. 무지는 2003년, 무인양품 1호점으로 1983년 문을 연 아오야마 지점을 레노베이션하며 상징적으로 ‘파운드 무지’로 간판을 바꿔 달아 새로운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렸다. 일본과 특히 그 지역에서 잊힌 문화를 복기하는 새로운 제품 라인을 선보인 것. 현대인의 생활 습관에 맞게 공예가의 가치를 전승한 왕골 바구니, 유리병, 도자 찻잔 등 일상생활에서 쓰임새가 좋은 물건들이다. 기존 매장들도 한쪽에 파운드 무지 코너를 만들어 확산시켜가는 중이다. 파운드 무지를 설명하는 책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무지의 혁신이란 단순히 창조의 과정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혁신은 삶을 돌아보고 재탐색하고 재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지는 일상에 이미 존재하는 견고하고 오래 지속되어온 필수품을 새롭게 바뀐 라이프스타일, 문화, 풍속에 맞게, 그리고 합리적인 가격에 재생산하고자 합니다.” 전통적인 민속 공예는 보통 사람들의 삶의 양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무지가 생각하는 디자인도 바로 그렇다.

협업 디자이너를 고르는 단 하나의 기준
무지는 디자이너로 구성된 자문단을 두고 경영진과 정기적인 만남을 갖는 걸로 잘 알려져 있다. ‘좋은 상품’, ‘좋은 환경’, ‘좋은 정보’ 라는 3개 요소를 유기적으로 연계하고자 각 분야를 대표하는 크리에이티브와 마주 앉아 요즘 눈에 띄는 것에서부터 고령화사회에 대한 토론까지 폭넓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개개인의 삶의 철학과 궤를 같이 하는 무지의 철학을 공유하는 이들이 모여 무인양품의 방향성을 체크하고, 가치를 계승하는 크리에이티브 싱크탱크인 셈이다. 현재 멤버는 카피라이터 출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가주코 고이케, 아트 디렉터 하라 겐야, 공간 디자인을 담당하는 스기모토 다카시, 제품 디자이너 나오토 후카사와, 그리고 2016년 7월부로 오랜간만에 새로운 멤버로 합류한 텍스타일 디자이너 수도 레이코다. 디자인 전문 회사 누노(NUNO)의 디자인 디렉터이기도 한 수도 레이코는 ‘좋은 상품’ 영역 중에서도 특히 패브릭에 관련된 컨설팅을 돕는다. 물론 무지에도 인하우스 디자인 조직이 있다. 하지만 전체 70명이 조금 안되는 정도로, 전체 직원이 5600명이 넘는 기업 규모에 견주어볼 때 많다고는 할 수 없다. 대신 무지는 나오토 후카사와의 디렉션 아래 프로젝트별로 외부 디자이너와 긴밀한 협업한다. 마음이 꼭 맞는 디자이너와 오랜 기간 함께 일하는 편인데, 대표적인 예가 영국의 인더스트리얼 퍼실리티(Industrial Facility)다.

건축가 샘 헥트(Sam Hecht)와 산업 디자이너 킴 콜린(Kim Colin)이 2002년 설립한 인더스트리얼 퍼실리티는 회사 이름만큼이나 직관적이고 군더더기 없는 제품 디자인으로 잘 알려진 회사다. 샘 헥트는 2000년 초 자신의 런던 집에서 가나이 회장, 10명 정도의 무지 직원과의 첫 미팅을 가졌다고 한다. 학창 시절부터 무지의 오랜 팬이었던 샘 헥트의 공간은 무지 제품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공간에서의 미팅은 비즈니스라기보다는 두 협업자의 철학과 삶에 대한 진중한 대화와 공감에 가까웠다고. 사실 나오토 후카사와가 디자인한 벽걸이형 CD 플레이어나 인더스트리얼 퍼실리티의 욕실용 오디오는 누가 봐도 그저 ‘무지’다. 발뮤다와 협업한 공기청정기도 발뮤다의 기술을 입힌 그저 ‘무지’다. 7000여 개의 제품은 물론, 무지라는 이름을 단 어떤 형태의 플랫폼이 동일한 톤을 유지한다는 것은 사고방식의 아주 긴밀한 합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무지의 크리에이티브 자문단

가주코 고이케(Kazuko Koike)
자문단의 창립 멤버로 그간 <이세이 미야케, 동양과 서양이 만나다Issey Miyake, East Meets West > <일본 디자인Japan Design> <일본의 채색Japanese Coloring > 등 일본다움에 대해 확고한 견지를 갖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다. 무지의 콘셉트를 설정하고 확장하는 데 막강한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다.

스기모토 다카시(Takashi Sugimoto)
역시 자문단의 창립 멤버로, 1973년 일본 최초의 상업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 슈퍼 포테이토를 창업한 인테리어 디자이너다. 무인양품의 매장, 전시, 설치 작품, 레노베이션 등 무지와 관련된 공간 디자인을 총괄한다.

하라 겐야(Hara Kenya)
<디자인의 디자인> <백>을 통해 일본의 미의식을 디자이너 관점에서 해석해온 그래픽 디자이너다. 2001년부터 자문단에 합류해 무지의 아이덴티티와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톤 전반을 책임지는 아트 디렉터 역할을 한다.

나오토 후카사와(Naoto Fukasawa)
2001년 무지의 제품 디렉터로 추대됐다. <슈퍼 노멀 Super Normal> 등의 저자이기도 한 그는 의식하지 않은 감각과 행동에서 디자인을 찾는 워크숍 ‘의식 중심(Without Thought)’을 진행해왔다. 그 과정에서 나온 것이 환기 팬을 작동시키기 위해 매달린 끈을 잡아당기면 CD가 돌아가며 음악이 흘러나오는 벽걸이형 CD 플레이어다.

수도 레이코(Sudo Reiko)
전통과 하이테크를 융합해 독보적인 텍스타일 소재를 개발하는 누오(NUNO)사 대표다. 1984년 회사를 창립한 이래 일본의 수많은 방직 장인, 염색 장인과 실험적인 소재를 개발해오며 1990년대 초반부터 뉴욕, 샌프란시스코, 런던, 프랑크푸르트 등지에 진출해 쇼룸과 전시를 선보여왔다.

지속 가능하고 땅에 가까운 라이프스타일을 팝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거품 붕괴 직후라고 여겨지는 2004년, 무지는 공장에서 만든 ‘레디메이드’ 집 ‘무지 하우스’를 팔기 시작했다. 나무로 된 집, 창이 많은 집, 세로 형태의 집, 세 가지 모델은 유연한 내부 구조가 특징인데, 이는 초고령화사회, 1인 가구 등 급변하는 사회적 환경에 대처할 수 있는 오래가는 집을 추구한 결과다. 하라 겐야는 일찍이 집을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라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다양한 산업의 교두보로 봤다. 그리고 2013년 초 ‘도쿄 하우스 비전’이라는 행사를 기획하며 이에 대한 화두를 열고 일본의 내로라하는 건축가, 디자이너가 집에 대해 콘퍼런스를 열고, 기업과 협업해 새로운 생각과 아이디어를 담은 집을 구현한 전시회도 열었다. 2016년 7월 한 달간 열린 두 번째 하우스 비전의 주제는 ‘함께(co)’와 ‘개인(indivisual)’의 합성어인 ‘코-디비주얼’이었다. 도요 이토, 구마 겐코, 시게루 반, 후지모토 소우 등 일본을 대표하는 디자이너와 건축가들이 에어비앤비를 비롯해 토요타, 파나소닉, 쓰타야 서점을 운영하는 CCC(Culture Convenience Club) 등 12개 기업과 짝을 이뤄 그들이 생각하는 가까운 미래의 주택을 디자인했다.

무지는 건축 사무소 아틀리에 바우와우와 협업해 2층으로 나뉜 원두막 형태의 주택을 제시했는데, 일본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통적인 오두막으로 좁다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A자 형태로 굽은 지붕 아래 사방으로 탁 트인 테라스의 업무 공간이 나온다. 도시의 업무 환경을 농촌의 세팅으로 가져온 구조에는 평소 무지가 강조해온 토착화의 중요성, 더 가까이는 ‘농사의 경건함, 농업의 중요성’이라는 키워드가 녹아 있다. 무지는 생활 속 사소한 단편에서부터 지구 규모의 미래를 내다보는 배려의 집합체로 남고 싶다고 말한다. 건축이나 디자인, 패션에는 별 관심이 없고 ‘도움이 되는 일’에 모든 관심을 쏟는다고 말한다. 도움이 되고 싶은 부분은 ‘손상된 지구의 재생’, ‘다양한 문명의 재인식’, ‘콘티넨털한 (유럽 대륙식) 스타일의 탈출’, ‘쾌적함과 편리함의 접점에 대한 재고’, ‘새것의 매끈함과 반짝임만이 전부가 아닌 미의식의 부흥’ 등이라고 말한다. 어색한 일본어 표현의 번역 때문만이라기보다 흔히 입 밖으로 주창하는 기치가 아니어서 더욱 낯설다. 하지만 이 표어 하나하나는 무지 설립 초기부터 크건 작건 실천해온 일관된 철학이자 중추적인 전략이었다. 무지가 광할한 자연에서 운영 중인 캠핑장도 이 연장선상에 있다. 도쿄에서 차로 서너 시간 거리의 농경 지대인 니가타 현의 쓰난, 기푸 현의 미나미노리쿠라, 군마 현의 마고이에 있는 무지 헛에서의 하룻밤은 땅과 연결되었음을 끊임없이 되뇌이는 무지의 라이프스타일의 일일 체험 현장이다.

희망의 질을 개선하는 일
무지는 비즈니스가 잘되는 비결을 이야기할 때 ‘좋은 토양’을 자주 말한다. 소비자들에게 무지의 참뜻을 온전히 전달하려면 무지가 뿌리 내리는 지역의 생활 수준을 높여, 무지만큼의 라이프스타일을 욕망하도록 하는 게 결국 무지에게도 좋은 일이라는 얘기다. 하라 겐야는 2010년 월간 <디자인>과의 인터뷰에서 “일본 기업이란 일본의 토양에서 자란 나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 자동차가 좋은 열매가 되려면 일본의 경제・문화권 사람들의 자동차에 대한 욕망 수준이 높아져야 하고, 그렇게 되면 자연히 그 토양에서 자란 나무의 열매, 자동차의 수준도 덩달아 높아지는 것입니다. 열매만 디자인한다고 다가 아니라 전체적인 자동차에 대한 수요의 질을 높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죠”라며 “그 희망의 질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고민하는 게 디자인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소신을 말했다.

여기 인류가 발을 딛고 선 이 땅이 있고 저 하늘에 우리가 우러러보는 가치가 있다. 땅에서 하늘까지 도달하기 위해 지녀야 할 겸허한 마음가짐, 삶을 대하는 꼿꼿한 몸가짐을 무지는 ‘삶에 대한 미의식’이라고 봤다. 디자인이라는 용어가 통용되기 이전부터 우리는 손수건을 반으로 접어 보관하는 방법, 베개 커버 끝을 깔끔히 빼내 완벽한 사각 형태를 만드는 방법 등 삶에서 미의식을 실천해왔다.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여러 과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란 인간 본연의 위대한 본능을 다시 살려내는 것이라고, 무지는 디자인을 정의하고 있다.

바이라인 : 김은아
디자인하우스 (월간디자인 2017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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