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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슈퍼마켓 패키지 디자인 (1)
글쓴이 : 패키지포유 날짜 : 2013-11-20 (수) 12:21 조회 : 4780

1. 영국 슈퍼마켓 소비자 트렌드

오늘날 슈퍼마켓은 더 이상 단순히 ‘파 한 단’ ‘두부 한 모’를 파는 공간에 그치지 않는다. 불경기가 시작된 이래 소비자가 슈퍼마켓에 한 번 들를 때마다 쓰는 지출은 더 커지고 있다. 더 나은 선택을 위해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소비자의 러브마크가 되기 위해 슈퍼마켓 브랜드의 마케팅과 디자인은 더 흥미진진해지고 있다.

 

 

웨이트로즈 슈퍼마켓의 내부. 약간 어두운 영국의 여느 슈퍼마켓과는 달리, 웨이트로즈는 밝은 조명으로 화사한 분위기이다.

 

왜 영국 슈퍼마켓인가?
적어도 유통 산업이란 측면에서 볼 때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미국, 아시아에서는 일본, 유럽에서는 영국을 각 지역을 대표하는 선진국으로 꼽아도 크게 틀린 일은 아닐 것이다. 유통 산업의 발전은 자본주의적 상업 발전과 궤를 함께하기 때문이며, 위 세 나라는 일찍부터 상업과 유통의 가치에 눈을 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영국이야말로 슈퍼마켓 문화의 트렌드를 선도하는 나라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미국의 경우는 땅이 워낙 넓다 보니 가끔 차를 타고 가서 대량으로 쇼핑하는 문화가 발달했고, 이에 따라 오밀조밀하게 구획한 매장보다는 거대한 규모의 창고형 매장이 발달했다. 그러나 영국의 경우는 집이 좁아서 음식을 쌓아놓을 공간이 부족하고, 차를 타고 장거리를 이동하기보다는 걸어 다니거나 자전거를 타는 생활 패턴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집 근처 가게에서 조금씩 자주 쇼핑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이러한 소비자에게 감성적으로 소구하기 위해 근처 가게에서 조금씩 자주 구매하는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상품과 마케팅이 발달했다. 그래서 고기든 야채든 소량 포장으로 파는 게 일반적이다. 이번에는 유럽의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어떠한가? 대부분의 유럽 상점은 휴일 영업은 고사하고 평일에도 저녁에 일찌감치 문을 닫아버리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1987년부터 법적으로 영업시간 제한이 사라졌다. 물론 한국이나 일본처럼 24시간 영업 매장이 지천으로 깔려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유럽 국가 중에서는 ‘할 수 있을 때 하는 쇼핑’이 아닌 ‘하고 싶을 때 하는 쇼핑’ 문화가 가장 발달한 곳으로 소비자의 권력이 강한 편이다. 

제이미 올리버, 고든 램지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요리사를 배출한 영국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영국 국민의 식문화는 척박한 편이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즉석 식품에 의지하기 때문에 영국인의 식비에서 인스턴트식품이 차지하는 비율은 프랑스와 독일의 2배, 이탈리아의 4배가 넘는다. 이처럼 인스턴트식품 수요가 높은 이유는 야채를 대부분 수입하고서 유럽 국가 중 노동 시간이 비교적 긴 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국인은 새로운 음식에 대한 호기심만큼은 큰 편인 듯하다. 커리 등 이국적인 음식에 관해서는 전체 유럽의 소비량 중 70%를 차지하는 곳이 영국이다. 또한 일찌감치 채식주의가 발달한 나라답게 환경 문제에 대한 소비자 의식이 높다 보니, 기업 또한 환경 친화적인 디자인이나 지속 가능한 상품을 개발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영국 슈퍼마켓 소비자 트렌드
영국의 슈퍼마켓은 테스코(Tesco), ASDA, 세인즈버리(Sainsbury’s), 모리슨(Morrison)이라는 4대 대형 마트가 전체 시장 매출의 75%를 차지한다. 그리고 웨이트로즈(Waitrose), M&S 등 고급 슈퍼마켓이 10% 미만을 차지하며 해러즈(Harrods), 포트넘 & 메이슨(Fortnum & Mason), 하비 니콜스(Harvey Nichols), 셀프리지스(Selfridges) 등 백화점에 부속된 슈퍼마켓은 극소수 상위 계층과 관광객을 타깃으로 한다. 마지막으로 ALDI, LiDL 등 주로 독일에서 들어온 저가 할인 매장이 있다. 과거 영국의 슈퍼마켓은 이렇듯 고가·저가 슈퍼마켓으로 나뉘어 같은 부류에 속하는 업체들끼리 경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싼 것’을 찾는 쇼핑이 아니라 ‘가치’를 따지는 소비자 트렌드가 대두되면서 슈퍼마켓 사이에서 수직 이동이 일어나고 있다. 한동안은 유기농 제품이 성장세였으나, 유기농의 효과에 대한 논란이 일고 소비자 자신도 다양한 가치를 추구함에 따라 현재는 공정 무역, 지역 상품, 프리미엄 상품 등의 여러 갈래로 분화되어 각각 성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시내 곳곳에 위치해 접근성이 좋은 일반 슈퍼는 다양한 생필품과 식품을 판매하는데, 우리나라 편의점의 3배 정도 되는 규모이다. 특히 영국 슈퍼마켓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다양한 PB 상품이다. 각각의 슈퍼마켓은 PB 상품으로 다른 업체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며, 영국에서 PB 상품 소비 비율은 슈퍼마켓 전체 매출의 45%를 차지한다. 특히 2년 전 금융 위기로 시작된 불황은 일반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PB 상품에 대한 선호도를 더욱 높였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2008년 25%에 불과하던 PB 상품 선호도가 2009년에는 73%로 급상승했으며, 이러한 성장세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은 고급 슈퍼마켓 및 백화점 식품 코너를 중심으로 다채로운 PB 상품이 쏟아져 나오는 기간으로 이 시기의 PB 패키지는 꼭 한번 참고할 만하다. 

생활비를 절약하기 위해 외식을 줄이는 대신 직접 요리를 하는 소비자가 늘어남에 따라 슈퍼마켓 또한 고급 조리 식품과 오븐에 넣기만 하면 되는 반조리 식품을 내놓고 있는데, 특히 레스토랑 외식을 대체할 수 있도록 애피타이저, 메인 요리, 디저트, 와인을 묶어 ‘집에서 즐기는 코스 요리’ 콘셉트로 판매하는 것이 흥미롭다. 한편 몇 년 전부터 넘쳐나는 유명 요리사와 다양한 요리 관련 프로그램, 요리책 출판 등으로 시작된 트렌드는 최근 슈퍼마켓의 요리 교실 개설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스타 요리사’의 원조이자 영국 학교 급식 혁명에 앞장서 화제가 된 제이미 올리버 또한 식품 매장과 요리 교실을 겸한 레시피즈(Recipease)를 열었다. 

 

 

01 테스코(TESCO) 한국에도 홈플러스와 제휴해 들어온 영국 시장 점유율 1위의 슈퍼마켓 체인으로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다. tesco.com

02 세인즈버리(Sainsbury’s) 영국 시장 점유율 3위의 슈퍼마켓 체인이다. 패딩턴(Paddington) 역을 비롯해 시내 곳곳에 매장이 있다. sainsburys.co.uk

03 웨이트로즈(Waitrose) 런던 곳곳에 매장이 있지만 옥스퍼드 스트리트(Oxford Street) 역 부근의 존 루이스 백화점 지하, 셰퍼드 부시(Shepherd Bush) 역 부근의 웨스트필드(Westfield) 쇼핑센터, 카나리 워프(Canary Wharf) 역 인근 매장이 특히 볼만하다. waitrose.com

04 M&S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종합 슈퍼마켓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100% PB 상품만 판매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대부분의 기차역과 시내 곳곳에 들어서 있다. marksandspencer.com

05 언패키지드(Unpackaged) 패키지가 없는 것이 특징인 식품 가게로, 미리 장바구니를 챙겨 가야 한다. 이슬링턴 주거 지역 암웰 스트리트(Amwell Street)에 있다. beunpackaged.com

06 데일스포드 오가닉(Daylesford Organic) 자체 유기농 농장에서 생산한 제품을 판매하는 것으로 유명한 유기농 식품점으로 레스토랑, 커피숍, 요리 교실을 함께 운영한다. 슬론 스퀘어(Sloan Square) 역, 노팅힐(Nottinghill gate) 역 부근에 매장이 있으며 셀프리지스에도 입점해 있다. daylesfordorganic.com

07 레시피즈(Recipease) 제이미 올리버가 운영하는 요리 교실이자 식품 매장이다. 클래펌 정션(Clapham Junction) 역 부근에 있다. jamieoliver.com

08 하비 니콜스(Harvey Nichols) 푸드마켓 피프스 플로어(Fifth Floor)라고 불리는 5층 식당가 식품 매장의 PB 상품이 유명하다. 나이츠브리지(Knightsbridge) 역 부근에 있다. harveynichols.com

09 셀프리지스(Selfridges) 푸드홀 노랑과 검정의 강한 대비를 아이덴티티로 하는 PB 상품과 유명 브랜드와 협업한 한정판 상품으로 유명하다. 본드 스트리트(Bond Street) 역 부근에 있다. selfridges.com

10 해러즈(Harrods) 푸드홀 백화점 식품 매장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웅장한 건물과 런던의 아이콘을 관광 상품화한 PB 상품으로 유명하다. 나이츠브리지(Knightsbridge) 역 부근에 있다. harrods.com

11 포트넘 & 메이슨(Fortnum & Mason) 영국을 대표하는 식료품 및 홍차 브랜드로 티타임을 위한 다양한 고급 차와 스낵 PB 상품을 갖추고 있다. 피카딜리 서커스(Piccadilly Circus) 역 부근에 있다. fortnumandmason.com

 

 

2. 웨이트로즈

웨이트로즈(Waitrose)는 영국의 ‘국민 백화점’인 존 루이스(John Lewis) 그룹에 속한 고급 슈퍼마켓 체인이다. 영국 내에서 4.3%의 시장 점유율로 6번 째 정도의 크지 않은 규모지만, 유기농 식품 분야에서는 18% 점유율로 매년 고객 만족도 설문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높은 품질과 서비스로 최근 업계 평균 2배를 웃도는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01 샌드위치와 함께 판매하는 샐러드. 인스턴트식품, 조리 식품 등 많이 판매하는 메뉴일수록 패키지 앞면에 열량, 지방, 설탕 등의 성분 정보를 빨강, 주황, 초록의 컬러 시스템을 이용해 명확히 표시한다.
02 대표적인 가족 요리인 로스트 햄의 고급형 제품. 자연스러운 패키지 색상과 햄 위에 얹은 오렌지와 허브를 보여주는 투명 부분, 검은 라벨, 품질을 보증하는 스탬프 등의 디자인 요소가 모여 고급스러운 패키지를 완성한다.
03 에센셜 웨이트로즈의 비트(beet) 샐러드. 비트의 자주색과 흰색의 조화가 산뜻하다. 에센셜 웨이트로즈의 다른 제품도 이와 같은 디자인으로 내용물과 포인트 컬러를 맞춘다.
04 식재료 제품군 쿡스 인그리디언트(Cooks’ Ingredients) 중 계피향 설탕. 타이포그래피 위주의 라벨 디자인이다. ‘살짝 뿌리는(sprinkle)’ 설탕의 특성을 잘 드러낸 투명 용기가 완성도를 높인다.

 

편안한 느낌을 강조하는 존 루이스 백화점과 마찬가지로 웨이트로즈는 곳곳에 나무 소재 마감을 적용하고 선반 사이에는 널찍한 공간을 확보해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화사한 인테리어를 적용했다. 에너지 절약을 이유로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밝기만을 유지하는 여느 영국 슈퍼마켓과는 달리 웨이트로즈는 유일하게 매장 전체에 환한 불을 밝히고 있다. 웨이트로즈의 PB 상품은 크게 흰색을 바탕으로 한 저가 라인(essential waitrose, 이하 에센셜 웨이트로즈), 컬러풀한 중간 라인, 블랙을 사용한 프리미엄 라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가격 별로 PB 상품에 선을 긋기보다는 다양성에 초점을 맞춰 개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식품 패키지 디자인은 비교적 수명이 짧은 편이다. 그러나 웨이트로즈의 PB 상품은 그렇게 잊혀지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완성도 높은 디자인을 보여준다. 특히 웨이트로즈가 크리스마스 시즌을 전후해 내놓는 초콜릿 패키지는 백화점과 고급 초콜릿 전문점의 상품에 비해 비교적 저렴한 대안으로 각광받는데, 이 시기엔 순간적으로 점유율이 올라가기도 한다.

 

 

01 크리스마스용 비스킷 패키지.
02 요리 준비할 시간이 부족한 소비자를 위해 감자, 당근, 양파처럼 손이 많이 가는 야채를 미리 다듬어 판매하는 레디 필드(Ready Peeled) 제품.
03 이지 투 쿡( Easy to cook) 제품은 오븐에 데우기만 하면 곧바로 맛있고 이국적인 식사를 할 수 있다.
04 웨이트로즈 홀섬(Waitrose Wholesome) 제품은 어떤 감미료도 들어가지 않은 말린 과일, 콩, 쌀, 파스타, 밀가루 등의 건강 식품이다.
05 쿡스 인그리디언트(Cooks’ Ingredient) 라인 중 허브 제품. ‘쿨민트는 젤리에만 쓰는 건 아니다’라는 라벨로 흥미를 끈다. 새로운 패키지는 매출을 5.1% 증가시켰고, 시장에서의 성과가 중요한 심사 기준이 되는 DBA의 디자인 효과상(Design Effectiveness Awards)을 수상했다.
06 포도, 딸기, 블루베리 등 여름 과일을 한데 모은 서머베리(Summer Berries) 제품.

 

 

 고급 슈퍼마켓은 고객의 충성도를 이끌어내는 것이 필수적이지만, 웨이트로즈는 흔히 사용하는 전략인 멤버십 마케팅을 하지 않는다. 세계적인 경제난이 시작된 2008년, 관련 업계는 고급 슈퍼마켓인 웨이트로즈에 대해 부정적인 예측을 내놓았다. 그러나 2010년 3월 선보인 저가 제품군 에센셜 웨이트로즈는 예상을 뒤엎고 독주를 시작했다. 에센셜 웨이트로즈는 기존 제품 및 새로운 제품을 추가해 1400여 개의 제품을 하나의 브랜드로 재탄생시켰고, 웨이트로즈의 유일한 단점으로 지적되던 높은 가격 문턱을 낮추는 역할을 해냈다. 흰색 바탕에 원색 그래픽과 텍스트를 일관된 디자인 탬플릿으로 적용해 멀리서도 단연 눈에 띄는 에센셜 웨이트로즈는, 선뜻 상품에 손을 뻗기 부담스러운 웨이트로즈 매장에서 고객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역할을 한다.

 

 

(왼쪽) 정기적으로 발행하는 <웨이트로즈> 무료 잡지. 지난 여름에는 ‘여름에 어울리는 칵테일 레시피’를 주제로 했다.

 

웨이트로즈는 에센셜 웨이트로즈 라인 출시과 더불어 뉴스레터 발행은 물론 아이폰 앱, 유튜브 채널 등 최근 각광받고 있는 마케팅 도구를 줄줄이 접목하고 있다. 특히 이 마케팅 전략은 서로 다른 개성의 두 유명 요리사와 협력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가 요리쇼에서 이용한 재료는 그다음 날 매출이 올라간다’는 ‘딜리아 효과’라는 말을 탄생시킬 정도로 유명한 가정식 요리의 대가 딜리아 스미스(Delia Smith), 그리고 식재료 최고의 맛을 끌어내기 위한 분자 요리와 실험적인 요리법으로 세계 3대 레스토랑으로 뽑힌 팻 덕(Fat Duck)을 운영하는 헤스턴 블루멘탈(Heston Blumenthal)의 조합은 첫 8주 동안에만 37만 회의 추가 주문을 이끌어냈다. 웨이트로즈는 두 유명 요리사의 조리법을 바탕으로 반조리 식품을 출시하는 것은 물론, 이들 요리사의 요리법을 모은 레시피 카드를 정기적으로 발행한다. 그리고 이 레서피 카드를 보고 찾아온 소비자가 매장 여기저기를 헤매지 않아도 되도록, 레시피에 나온 재료를 한데 모아 판매하는 프로모션 전략으로 식재료의 매출 또한 끌어올리고 있다.

 

이러한 성장세에 힘입어 최근 웨이트로즈는 외부 파트너십으로 그 규모를 키워나가고 있다. 영국 왕세자가 설립한 고급 유기농 브랜드 ‘더치 오리지널Duchy Originals’을 인수해 PB 브랜드와는 다른 독립적인 브랜드로 운영하고 있으며, 치솟는 인기에 비해 매장이 잉글랜드 남부 지역에만 집중되어 있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프리미엄 온라인 슈퍼마켓 오카도(Ocado)와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오픈한 지 얼마 되지않은 런던 웨스트필드 쇼핑센터(Westfield Shopping Centre) 매장. 반지하 매장이지만 화사한 인테리어 덕분에 전혀 갑갑하지 않다. 오히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전체 매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시원스러운 인테리어다. 영국 슈퍼마켓 중에는 입구에서 꽃다발을 파는 곳이 많은데, 이곳 또한 그러하다.

 

 

3. 언패키지드

영국의 경우 소비자가 리테일 숍에서 50파운드를 쓸 때 그중 8파운드는 패키지 비용으로 소모된다고 한다. 이렇듯 많은 돈이 패키지에 사용되는 것을 생각해볼 때, 패키지 디자인과 포장에 들어가는 돈을 줄인다면 물건 값을 대폭 낮출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유기농 식품이나 공정 무역 제품은 일반 제품에 비해 값이 비싸 소비자가 선택하기에 망설이게 되는데, 패키지 비용을 줄인다면 그 가격을 대폭 낮출 수 있을지 모른다. 캐서린 콘웨이(Catherine Conway)는 바로 이런 전제하에 런던의 한 가게에서 식재료를 패키지 없이 무게 단위로 팔고, 리필하러 오는 고객의 충성도를 바탕으로 한 사업을 테스트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패키지 없는 가게’라는 콘셉트의 성공 가능성을 1년 동안 확인한 캐서린 콘웨이는 2007년 런던 이슬링턴에 패키지가 없는 가게 언패키지드(Unpackaged)를 열었다.

 

 

고객이 장바구니에 직접 담아 갈 수 있도록 한 곡물, 시리얼, 밀가루 등의 식재료.

 

 

(왼쪽) 네모난 진열대가 바닥의 체스판 무늬와 조화를 이룬 인테리어가 재미있다. 오래된 건물이라 바닥 타일은 교체할 수 없다는 제한이 오히려 ‘바닥에서 솟아난 듯한 진열대’라는 아이디어로 이어졌다.
(오른쪽) 클래식한 인테리어와 어울리는 금색의 심플한 언패키지드 로고. 창문에 금색 윤곽선으로 그린 여러 형태의 병 그림을 통해 가게를 들여다보면, 가게의 모든 재료가 병에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언패키지드에서 쇼핑을 하려는 고객은 먼저 웹에 올라와 있는 상품을 체크하고, 사려는 물건에 맞게 장바구니를 준비해 가야 한다. 장바구니를 챙겨 오면 약간의 할인 혜택이 있다. 물론 장바구니를 가져오는 걸 잊은 고객을 위해 지퍼백 포장 봉투를 비치해두지만 75% 이상의 고객은 장바구니를 챙겨온다고 한다. 현재 영국은 식자재의 60% 이상을 수입하고 있지만, 언패키지드는 ‘비행기를 타고 운송된 식자재는 판매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푸드 마일(농산물 등 식료품이 생산자 손을 떠나 소비자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이동 거리)이 짧은 지역 제품과 제철 식품만을 판매한다. 식료품 외에 샴푸와 세제 등의 리필 제품과 인증 받은 공정 무역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캐서린은 목표를 ‘소비자가 자신과 환경을 위해 더 쉽게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특히 하나 사면 하나를 덤으로 주는 마케팅에 질린 소비자, 필요 이상으로 사서 남는 건 버리는 소비를 거부하는 소비자들로부터 호응을 얻고 있다. 사실 언패키지드는 보기에 따라선 ‘그저 잊혀져 가는 재래시장의 판매 방식을 부활시킨 것에 불과한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언패키지드는 소수이지만 충성도 높은 고객에게 어필하는 마케팅, ‘패키지를 없앤다’는 스타일리시한 브랜딩으로 성공을 거둬 <가디언> 주말판인 <옵저버>의 월간 푸드 특집에서 ‘환경을 구하는 40인의 영웅(Top 40 Eco Hero)’으로 선정된 바 있다.  

 

 

(왼쪽) 언패키지드에 대한 안내서. ‘담고, 재고, 계산하고, 절약한다’는 아이콘이 그려져 있다.

 

 

4. M&S

웨이트로즈와 함께 고급 슈퍼마켓을 대표하는 막스 & 스펜서(Marks & Spencer, 이하 M&S)는 의류, 가구, 음식 등을 판매하는 종합 리테일 브랜드이다. 1930년 처음 문을 연 M&S는 수입산 외국 식품, 제품 원료가 늘어나기 시작하던 1970년대부터 ‘영국산을 이용한 최상의 품질’을 강조해왔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100% PB 상품만을 판매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요리를 하는 게 유행인 트렌드에 맞춰 출시한 식재료 제품군. 패키지 라벨은 제품명, 제품 설명, 제품 사용법이나 원재료를 표현한 일러스트의 3단 구성으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M&S 매장은 ‘옷 매장’과 ‘식품 매장’으로 나뉘며 매장 위치나 인구 규모에 따라 구성이 달라진다. 식품관은 심플리 푸드(Simply Food)라는 편의점 형식의 브랜드로 시내 및 기차역,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샌드위치, 샐러드, 초밥 도시락 등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판다. 흔히 PB 상품이라고 하면 저가 상품을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M&S의 PB 상품은 오히려 일반 대형 마트보다 10~50% 정도 비싸다. M&S는 전형적인 영국의 중산층을 대변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실제로 M&S의 주된 소비자는 다른 경쟁사에 비해 연령층이 약간 높은 편이다. 100% 자사 제품만 유통하던 M&S는 2009년 11월부터 코카콜라, 하인즈, 켈로그, 넛텔라와 같은 유명 브랜드 제품도 판매하기 시작했다. M&S 제품이 디자인 면에서 특정한 아이덴티티를 공유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대에 놓인 다른 브랜드의 제품과 비교해보면 M&S의 패키지가 얼마나 덜 자극적인지 알 수 있다. ‘오랜 전통’이 주요 마케팅 포인트이다 보니, 의도적으로 옛날 패키지를 재해석해 향수를 자극하거나 영국 국기나 영국의 아이콘을 활용한 디자인이 유난히 눈에 띄는 편이다. 하지만 이러한 M&S도 지난 2004년에는 클래식하지만 다소 낡은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진청색 세리프체의 ‘Marks & Spencer’로고를 버리고 산세리프체와 라임 그린색을 이용한 ‘YOUR M&S’로고로 대대적으로 리뉴얼한 바 있다.

 

‘친환경 제품’이나 ‘공정 무역 제품’은 일반 상품에 비해 조금 비싸긴 하지만,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소비자층을 주요 고객으로 둔 덕분인지 M&S는 적극적으로 지속 가능한 경영을 위해 나서고 있다. 2006년 ‘라벨 뒤를 보자(Look Behind the Label)’라는 캠페인을 통해 제품 생산과 원료 공급 방식에 대한 윤리적·친환경적 이슈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시작, 2007년에는 본격적으로 ‘플랜 A’라는 장기 지속 가능 전략을 발표했다. 5000만 파운드(한화로 약 890억 원)를 투자해 2015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지속 가능한 경영을 하는 유통업체로 거듭나겠다는 목표를 세운 것이다. 3만 6000개의 모든 제품 라인에 ‘유기농 인증’ 혹은 ‘공정 무역 인증’ 등 적어도 한 개 이상의 윤리적·친환경적 시스템을 반영하겠다는 것도 그러한 예이다. 올해엔 19종의 25ml 미니 와인 패키지를 페트병으로 바꾸었다. 페트병은 유리 패키지에 비해 88%나 가볍고 제작 과정에서 더 적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또한 M&S는 영국에서는 처음으로 시범적으로 쇼핑 비닐백에 5펜스의 요금을 부과하고, 시행에 앞서 한 달간 재활용 쇼핑백을 무료로 나눠준 바 있다. 또한 패키지에는 패키지의 각 부분을 재활용하기 위해 어떻게 분리수거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명시하는 것에 대해서도 적극적이다.

 

 

01 제철 식품이나 건강 식품을 홍보하기 위한 캠페인 ‘제대로 먹읍시다(Eat well)’ 심벌을 적용한 아스파라거스 패키지.
02 쌀쌀함(chilly)과 고추(chilli)의 발음이 같은 데서 아이디어를 얻은 ‘칠리 크리스마스’ 선물 세트. 고추, 매운 소스, 매운 초콜릿으로 구성되어 있다.
03 크리스마스 비스킷 패키지. 한 시즌에 다양한 스타일의 그래픽을 선보인다.
04 인버니스(Inverness)와 같은 영국의 지역명과 향수가 느껴지는 디자인으로 전통 과자라는 느낌을 주는 생강 비스킷 패키지.
05 공정 무역 제품군 패키지는 공정 무역 마크와 주목도가 높은 고급스러운 블랙 배경을 사용했다.
06 매장과 웹사이트 등에서 ‘플랜 A’ 캠페인을 알리는 프로모션 그래픽. 환경이 오염되더라도 다른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 생각은 ‘플랜 B’지만, 사실은 환경 보호라는 문제에 관해서 그런 해결책은 있을 수 없으므로 처음부터 환경을 오염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플랜 A’ 캠페인의 요지이다. ‘항공 운송(Air-Freighted)’이라는 심벌은 ‘이 제품은 어쩔 수 없이 외국에서 수입했지만, 이것을 제외한 모든 M&S 제품은 영국에서 생산된 것이다’라고 알리는 역설적인 효과가 있다.

 

 

5. 하비 니콜스

하비 니콜스(Harvey Nichols) 본점은 런던의 고급 쇼핑가 나이츠브리지(Knightsbridge) 역에 있다. 1813년 리넨 천을 팔던 소규모 가게로 시작해, 1880년 지금의 위치로 확장한 뒤 현재는 영국 내 5개 지점 및 아일랜드, 사우디아라비아, 홍콩, 자카르타에 해외 지점을 두고 있다. 줄여서 하비 닉(Harvey Nick)이라고도 하는 하비 니콜스는 런던의 3대 고급 백화점(하비 니콜스, 해러즈, 셀프리지스) 중 규모 면에서는 가장 작지만, 알차고 세련된 이미지가 강하다. 최대 경쟁자인 해러즈(Harrods)의 식품관이 규모와 중후함으로 압도한다면 하비 니콜스는 백화점 자체의 ‘작지만 스타일리시하다’는 콘셉트를 그대로 이어 ‘식재료의 부티크 쇼핑’이라는 느낌을 준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영국의 백화점과 고급 슈퍼마켓은 햄퍼(Hamper)라는 선물 세트를 출시하고 주문을 받기 위한 임시 고객 코너까지 따로 만든다. 본래 ‘햄퍼’는 ‘나무로 짠 선물 바구니’를 뜻한다. 하비 니콜스는 흑백 사진을 활용하는 하비 니콜스 PB 상품 아이덴티티에 맞추어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아이들의 사진이 인쇄된 패키지를 선보였다.

 

하비 니콜스의 식품 매장은 여느 백화점과 달리 꼭대기 층인 5층에 있다. 피프스 플로어(Fifth Floor)라는 이름으로 브랜딩한 이 층에는 식품 매장뿐 아니라 패셔너블한 레스토랑, 카페, 샴페인 바도 있다. 식품관을 꼭대기 층에 둔 것은 건물의 개조와 확장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처럼 보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자체가 하비 니콜스 백화점의 아이콘이 되어 이제는 모든 하비 니콜스 지점에 공통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프로모션의 초점 또한 식품 매장 자체보다 ‘런던 중심가 빌딩의 꼭대기 층에서 누리는 최고급 식문화’라는 경험에 맞춰져 있다. 레스토랑, 카페, 샴페인 바에서 풍겨 나오는 여유롭고 호사로운 분위기는 그 옆에 있는 식품 매장에도 영향을 미쳐, 무엇이든 하나 사고 싶은 기분이 들게끔 한다.

 

 

01 금속제 진열대가 독특한 하비 니콜스 식품 매장.
02 베컴 부부가 즐겨 찾는 식료품점으로 유명해진 하비 니콜스는 작년 ‘넌 내가 오늘 하비 니콜스 식품점에서 누굴 만났는지 상상도 못 할걸’이라는 콘셉트의 크리스마스 카드를 출시했다. 웨인 루니는 ‘웨인 자두(Wayne Pruney)’로, 퍼프 대디는 ‘콩 디디(Pea Diddy)’로, 브래드 피트는 ‘빵 피트(Bread Pitt)’로, 영국 전 국무총리 고든 브라운은 ‘고든 브라우니(Gordon Brownie)’로 대체시킨 센스가 재미있다.

 

 

03 브랜디를 첨가한 ‘포트 와인’. 기존의 와인 병을 사용하거나 하비 니콜스의 PB 아이덴티티를 따르는 대신 더욱 중후한 느낌을 주도록 따로 디자인했다.
04 하비 니콜스 PB 디자인 아이덴티티인 흑백 사진을 활용한 제품. 알루미늄 캔은 차와 스낵류에 가장 널리 쓰이는 용기이다.

 

한쪽 면을 뒤덮은 유리창으로 자연광이 들어오는 5층 한가운데 위치한 식품 매장은 심플하고 현대적인 철제 프레임의 선반과 나무 테이블을 함께 사용해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좁은 공간에 빽빽하게 들어선 제품은 일반 브랜드 제품과 하비 니콜스의 PB 상품이 섞여 있다. 가장 주를 이루는 하비 니콜스 PB 상품은 흑백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미지를 핵심 아이덴티티로 사용한다. PB 상품으로는 각종 소스, 차, 잼, 쿠키, 마요네즈 같은 음식을 비롯해 앞치마나 찻잔 등 간단한 주방용품이 있으며, 소량 포장으로 나온 선물용 제품도 있다. 브라운 혹은 그린 그레이 톤의 복고풍 사진과 절제된 타이포그래피로 전통 있는 이미지가 느껴지는 하비 니콜스의 PB 패키지는, 재치 있는 윈도 디스플레이가 만들어내는 현대적인 이미지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한다. 소비자의 눈을 사로잡는 강렬한 컬러와 내용물을 설명하는 텍스트를 사용한 패키지가 주를 이루는 요즘, 군더더기 없이 풍부한 감성을 표현하는 사진 컷으로 느낌을 함축하는 하비 니콜스 PB 상품의 아이덴티티는 오랫동안 큰 변화 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PB이외의 타사 브랜드 제품 또한, 미국제 땅콩 버터나 일본제 마요네즈 등 ‘본고장’에서 온 느낌이 물씬 나는 제품을 수집해놓았다. 이 밖에도 하비 니콜스는 11월쯤 되면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영국 곳곳에 임시로 식품 매장을 열곤 하는데, 이로써 늘어나는 제품군을 수용하고 좀 더 다양한 고객을 찾아가고 있다.

 

 

 

[출처] 월간디자인 (2010년 11월호) | 기자/에디터 : 전은경 편집장 대행, 정영호, 이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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